▲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2025년 깊어가는 신록 속, 가정의 달 5월도 이제 마지막 한 주만을 남겨두었습니다.
딸아이가 전통혼례로 결혼한 것이 5월 엊그제 같은데, 주말을 맞아 찾아온 손녀딸들이 달려와 깔깔대며 할아버지를 찾는 모습에 괜시리 미소가 지어집니다.
어느덧 저희 큰딸아이가 결혼한지도 10년이 지났습니다.
큰딸은 일반 결혼식장이 아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연동면 노송리 집에서 전통 방식으로 혼례를 올렸습니다.
애초부터 전통 혼례로 치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내와 딸이 예식장을 알아보고 하는 중에 제게 다도를 가르쳐 주셨던 연기향토박물관의 임영수 관장님께서 저희집에 놀러 오셨다가, 제 딸 결혼 소식을 들으셨는지 조심스레 전통 혼례로결혼식을 올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에도 전통 혼례는 무슨 축제 또는 행사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치 않았습니다.
‘한국 전통 혼례’
생각만 해도 막연했습니다.
과정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며, 결혼식장은 또 어디서 해야 하며 손님 접대 등등….
예식장과 식당에 맡기면 간단할 일들이지만 전통 혼례를 올린다고 하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덕담으로 넘기려 했지만, 임 관장님께서는 차분하게 조목조목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통혼례의 뜻과 격식을 듣고 보니, 결혼식이야말로 전통 혼례로 올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부쩍 굳어졌습니다.
임 관장님의 주관하에 우리집 한옥을 예식장으로 한 딸의 전통 혼례는 온마을 잔치로 큰 성황을 이루었고, 그 기록과 사진은 지금도 딸에게 부모가 준 가장 큰 선물의 하나로 가족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전통 혼례는 오늘날의 서구식 결혼문화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신랑이 입는 혼례복은 영의정이 입는 관복(사모관대)이고, 신부가 입는 옷은 왕비가 입는 녹색원삼(綠衣紅衫)이었습니다.
혼인날 신랑은 영의정의 관복을 입었으니 왕 이외에는 누구보다 높은 신분이었고, 신부는 왕비가 되었으니 더 이상 고귀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원님도 말 타고 가는 신랑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고, 비록 종이라도 이날만큼은 과거급제를 한 정승이었으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결혼하는 신랑신부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대접하고 결혼식을 축복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혼례는 신랑이 관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처가가 될 집에 가서 치르게 됩니다.
이를 ‘장가를 간다’ 또는 ‘장가를 든다’라고 하는 것인데, 장가를 가는 것은 아내의 집에 가는 건 맞지만, 장인과 장모가 있는 집으로 간다해서 ‘장가를 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혼례식은 바로 장가 즉, 장인장모의 집에서 치루게 되는데, 그것은 오로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신부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되어 시댁에서 쫒겨나는 사유가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신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신랑이 장모댁인 장가에서 기거하게 한 것입니다.
혼례는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교배례’, 하늘에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뜻에서 술잔을 드는 ‘서천지례’, 서로가 평생을 해로한다는 ‘서배우례’, 그리고 표주박을 붙여 원래는 한 뿌리였지만 달리 살다가 다시 합쳐졌다는 의미의 ‘합근례’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혼례는 이것으로 끝이지만, 사실 이게 진짜 끝은 아닙니다.
혼례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는 신방을 차리게 되는데, 아이를 일찍 갖기 위해 신방을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서쪽의 구석방에 차리게 됩니다. 이 방을 ‘서방(西房)’이라고 합니다.
‘김 서방, 이 서방’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고상하게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글 읽는 서방(書房)님이라고도 한 모양이지만, 사실은 아이를 빨리 낳기 위해 해가 잘 들지 않는 서쪽방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더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시집 간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장가에서 혼례를 올린 신혼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비로소 시댁에 들어가게 됩니다.
남편의 고향 집인 시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한 여자가 아이를 업고 시집을 가기도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대단히 이상하겠지만 당시에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율곡 선생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인 강릉 오죽헌에서 다섯 살까지 살다가 파주로 온 것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시댁에 와서 어른들에게 첫인사를 드리는 것을 ‘폐백’이라고 합니다.
유교문화의 옛날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여성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여러 풍습이 만들어졌습니다.
장가 오는 날 신랑이 기러기를 들고 장모에게 먼저 선을 보여 합격, 불합격을 판정받게 한 것은 딸의 결혼식은 오로지 친정어머니가 주관하게 하여 여성의 입장에서 딸을 보호하게 한 것이었고,
혼례식을 반드시 청사초롱을 켜고 밤에 거행한 것은 촛불 조명에 화장을 한 신부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 것이자 혼례식과 첫날밤의 간격을 가능한 짧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첫날밤, 할머니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를 뚫고 엿본 것은 관음(觀淫) 풍습이 아니고,
혹여 신랑이 신방에서 신부의 얼굴을 보고 야반도주(밤중에 도망가는 일)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신부를 지켜주는 감시였습니다.
신랑이 첫날밤을 지낸 후에는 신부를 버릴 수 없도록 한 당시의 풍습에서, 잔치가 끝나면 신부의 오빠들이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것도 온 집안이 나서서 신부를 보호해 주었던 미풍이었고,
반면에 신부의 속눈썹을 짙게 붙여 눈을 치켜 뜨지 못하게 한 것에는, 신랑은 성품을 보아야지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숨어 있었습니다.
또 신부는 시집 간 이후부터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던 실정에서 명절을 전후로 하여 ‘반보기’와 같은 풍습이 만들어졌습니다.
부모가 시집 보낸 딸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또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큰 신부를 달래주기 위해서 신부와 신부의 부모가 시댁과 처가의 절반쯤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혼인날 신부는 연지곤지를 찍습니다.
인류 최초의 화장품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연지의 유래는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쌍용총이나 무용총의 벽화를 통해 연지를 바른 악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지는 잇꽃(홍화)이나 주사로 만든 염료로서, 중국 연(燕)나라의 산물이라서 연지(燕脂)라 하는데 이 염료를 양 볼이나 입술, 그리고 미간의 중앙에 바르곤 하였습니다.
곤지(坤知)라는 것은 연지를 손가락으로 찍어 바르는 행위인데, 아기들에게 ‘곤지곤지’하면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찍는 동작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흔히들 볼에 바른 붉은 염료를 연지라 하고, 이마에 바른 것을 곤지라 한다는 해설도 있는데, 저는 ‘연지를 곤지한다’라는 말을 더 그럴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연지를 볼과 이마에 곤지하는 것입니다.
(곤지곤지도 건지곤지(乾知坤知)의 와전인데, 그 뜻은 ‘하늘을 알고 땅을 알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 연지를 바르는 이유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액운을 물리치기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궁녀들이 달거리 중임을 표시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즉, 궁녀가 달거리 중이면 왕도 잠자리를 피하기 때문에 신부가 연지곤지를 하면 아무리 왕이 라도 신부를 범하지 못한다는, 혼인의 신성성을 상징하는 표징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연지는 처녀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아름다움과 젊음의 표현이라는 설도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혼례에서 재혼일 경우에는 연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혼례는 제대로 치른다면 장가를 가서 시집으로 오기까지 수 년이 걸렸고, 그러한 혼례의식 속에는 가족의 신성함과 여성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고품격으로 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결혼을 중대한 인륜의 대사이자 사회적 약속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불과 30분 정도면 결혼식은 끝나고 하객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전통혼례는 이렇게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을이 동원되고 3년에서 5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완성됐는데, 그 과정에서 양가 부모간 그야말로 극존칭의 혼서를 주고 받는 것이나, 함(函:신랑이 신부측에 드리는 예단과 편지)을 들이고 결혼 예물을 주고받는 절차 등은 알고 보면 볼수록 품격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들이 상호 간에 베푼 지극정성과 예절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이러한 깊고 높으며 품격있는 전통혼례 의식의 의미를 알고 나자, 저는 더 주저할 것 없이 사랑하는 딸의 결혼식을 전통혼례식으로 올려 딸에게 인생의 선물로 선사하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임영수 관장님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혼례를 하루 앞두고, 잔치 국수를 만든다며 마을 할머니들이 일제히 산에 올라 옻나무니, 엄나무니, 산나물 등을 따와서는 국물을 우려내주셨던 일이며,
마을 어른들께서 “이게 몇 년만이여~”라며 50년도 더 된 삼베 차일을 마을 회관 창고에서 꺼내 대나무 기둥을 세워 천막을 친 일,
온종일 밀려드는 손님들에게 국수상을 담장 너머로 들고 다닌 일이며,
해병 동지들이 집 입구 골목에서 주차와 교통정리를 해주느라 호각을 불어대던 일이며,
막걸리 한 잔에 거나하게 소란스러웠던 그 북적거림이며...
그저 엊그제 같기만 합니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결혼식은 전통혼례식이 맞는 것만 같습니다.
결혼과 가족, 보호와 존중, 그리고 상호 배려와 예절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